'Daydream Diary/There's no philosophy'에 해당되는 글 25건

  1. fear (2) 2008/08/01
  2. 베터리가 부족합니다. (4) 2008/06/15
  3. 가지지 못한 것들이 주는 아름다움 (2) 2008/04/13
  4. 꿈은 꿈꾸고 있을때 가장 행복하다. (2) 2008/03/06
  5. 3개월 단위 리셋~ (2) 2008/03/05
  6. 커피 백잔의 여유~ 2008/02/26
  7. 마지막 편지 2008/02/15
  8. 경배하라 그 이름~ '돈' 2008/01/29
  9. 종교 이야기. (2) 2008/01/28
  10. 말이 씨가 된다! 장애인? 장애우? (6) 2008/01/20

closed / LG Kh-1400


-공포, 단절, 폐쇄, 고립, 소통불가, 자기혐오, 오해, 자존심, 고집, 강박증, 우울증, 정서불안 ...... -
:차갑게 닫힌 창으로 부터 나온건지 스스로로 부터 나온건지 알수 없는 질환들


220V 전원을 가지고 싶던 순간 / Canon Powershot S2 is



촬영하다 잠시 짬이나서 옆을 돌아보니

카메라와 프로젝터는 열심히 전기를 먹고 쉬고 있더라.

220V 60hz의 전기는 필요 없으니깐 한 스무시간쯤 허리 굳어버리게 늦잠좀 자자!!

......고 외치고 싶어도



일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고, 일이 나를 이끌어 삶을 밝게하며

일은 나를 밥먹여 살찌운다.

그래도 '일'덕분에 산다.

그 사람의 약속 / Canon 1D Mark2n + 24-70mmL


어린시절 부터 나는 '아름답다'는 대상이 꾀나 여럿이었다.

대략 그 대상들에 대한 공통점을 이어본다면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고 은은한 매력이 있으며 고유한 매력이 있는 것들에 아름답다는 말과 나만의 의미를 부여했다.


하루는 흩날리는 벚꽃잎 하나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봄의 아름다움에 이끌린 나는 벚나무 아래 손을 뻗어 벚꽃을 잡으려 애썼다.

순간 나는 이상한 차이를 느꼈다.

떨어지는 벚꽃, 피어난 벚꽃은 더할나위 없이 아름답다.

게다가 하나 하나가 같은 부분이 없이 재각각 색다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데......

내 손아귀에 움켜쥔 꽃잎은 하나같이 생기를 잃고 봄의 빛깔을 잃어갔다.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사물이!

'소유'라는 단 하나의 차이로 빛을 잃어갔다. 아름다움이 안개 걷히듯 사라졌다.


소유와 집착은 인간에게 강력한 에너지를 준다.

사유재산이 생긴이래로 자본주의의 경제는 꽃을 피워왔고

인생의 목표에 대한 집착은 대성한 인물을 위인이라 부르며 위인전집에 수록된 수많은 이름중 하나로 기억된다.

그것들 또한 나름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가지고 있기는 매 한가지랄수 있다.



하지만, 조화보다 꺾어낸 장미보다 아름다운 꽃은 길가에 피어난 작은 들꽃이다.

가지지 못한 모든 것들은 아름답기에, 가지지 못한 채로 고이 떠나보낼수 있나보다.

당신과 내가 함께 꾸었던 꿈 (삼청동) / Nikon FM2 + 50.8




당신에 대한 그리움으로

당신에 의한 추억만으로

당신만 보던 날들만으로

당신을 내내 걱정함으로

당신에 대한 미안함으로

내 당신에게 가진 사랑만으로





떠나온 인연, 다시 만나 내게 구원을 준 인연, 그리고 앞으로 만나야할 사람들

이 모두가 나와 영원할순 없겠지만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주고받은 교감이

나를 바꾸어가고

나의 세상을 만들어감을 오늘도 기억하며

내 어제를 지켜주고 오늘을 함께하는 당신들을 향해

'사랑합니다'

라는 한마디를 전하고 싶습니다.

귓가로 흘러가는 말로써의 사랑이 아니라

진정 당신의 맘에 닿는 사랑으로......
가끔씩 게으름을 피우거나 잠적을 해 준다는건, 내게 있어 중요한 일이다.

항상 새로움을 본능적으로 찾게되는 습성을 가진 탓일까?

100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면 컬러로 진행되어 오던 모든 일이 흑백

빛을 잃은 추억은 뒤로하고 새로운 뭔가를 찾아 나선다.


학원에서 애들을 가르칠때('가르치다'라고 쓰고 '앞길 막는다'라고 읽는다) 10개월 가까이 출근하는 동안

새로워 지려고, 더 열정적이고 더 꼼꼼하겠다고 다짐하면 처음엔 3개월......

점점 3일, 3시간, 3분(이건 심했나?)을 채 못넘기고 다시 틀에 갖힌다.

이 자연스러운 생활의 틀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생활의 달인'이라도 되어가는양

매일 하는일에 조금 더 나은 방법을 찾다 찾아는 나름대로의 '최적화'인 것이다.

문제는 이 최적화가 대개는 3개월, 즉 100일쯤 안에 이루어 지고 이뤄진 다음에 나는 그 틀에 나를 가둬버린다.

진화도 없이, 그저 나는 틀 밖의 세상은 모르는 톱니바퀴가 되어 버린다.


학원에서 스튜디오로 옮긴건 톱니밖의 세상을 보려는 힘없이 작는 톱니바퀴의 '깡'이었다.

그 깡으로 톱니바퀴가 작은 부분 일임하던 학원은 무려 5명의 아이들이 학원을 관둬버린다;;

아이들이 기적적인 수재였는지, 모두 성적이 오르는 우연을 경험했고, 나는 새로운 뭔가를 찾아 또 100일을 보냈다.


이러쿵 저러쿵 하며 시간이 흐르고 지금은 딱 한달째 놀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있어 열정과 도전과 시도의 한계는 딱 100일이 아닐까?

100일이면 내가 맡은 일에 작은 '도'가 트이고, 100일이면 여자친구의 사소한 것들까지 파악하게 되고

100번이면 내가 쓰는 물건이 자주쓰는 소지품이 되어버리고......


그 중에서 가장 신기한건

100일은 한참 전에 지난 삶을 살고 있지만

수많은 날들(뭐 아직 그렇게나 많지는 않지만)에 지겨워 하지 않는건

계절마다(한 3개월 마다) 달라지려고 하는 내 노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2008년의 봄, 따스한 100일간의 시간은 너와 나에게 진정 '봄'으로 다가올 것 같다.

Tag // 백수 일기,

이 한장을 위해 버려진 많은 비컷들을 위로하며.. / Canon 1D mark2 + 24-70mmL


'커피 한 잔의 여유'

90년대에 모 커피 광고 카피 문구이다.

최근 이 커피회사에서 이 브렌드는 강동원이 나오는 등의 CF 이전에

캔으로 된 커피의 광고중에선 아직까지도 '뛰면서 즐기는 커피 한잔의 여유'라는 이 광고 카피를 넘어선 문구가 없다.


영국애들은 '티타임'을 원수보다 아낀다.

동양에 중국의 대륙의 기상 '배째라식 여유의 양반'이나 조선식 '헛기침 흠흠 하는 여유부리는 양반'이 있다면 영국은

지독하게 티타임 여유를 찾는 신사의 나라라고 할까?

여튼 그들의 여유와 차 사랑은 징그럽다고들 한다.(아직 영국에 가서 직접 확인한바 없는 카더라 통신)


대략 한달을 놀았다.

부산도 다녀오고, 사람들을 만나며, 그 잘자는 잠은 시체처럼 자봤다.

영화도 많이 봤고, 만화책은 줄창 읽었으며, 음악은 평소보단 좀 덜 들었나보다.

이정도 여유면 '커피 백잔은 마실 여유'라고 해도 되겠네~


스스로에게 하지 않기로한 세가지중 하나인 어설픈 계획과 자기강요까지는 아니지만

이제 뭔가 쉬면서 충전한 기력을 써야 할 때가 온것 같다.

돈을 버는것이건, 공부를 하게 되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사랑을 하거나 그 뭔가가 되건간에!

마지막 편지 / 1D mark2 + 24-70mmL





혼자 그리던 밑그림을 마치고
 
당신의 소중한 그분과
 
인생의 여러가지 빛깔을 채색할 붓을 손을 마주잡는
 
당신의 영광스런 그날을 축복합니다.


 - 내가 그 사람에게 쓴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구절

돈으로 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자연과학을 탐구하는 학자가 되고싶은 욕심도 그를 위한 것이었고,

스튜디오에서 잠시 생활해 보고 꿈을 접었지만 상업적인 예술에 뜻을 뒀던것도 어느 경지에 이르면 돈으로 부터 자유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 자유를 향한 갈망에서 얻은건

남보다 조금(혹은 많이)부족한 돈 계산법과, 깐깐한 경제관념

어린시절 매사에 결벽을 보였던 나는 그때 그대로 컸더라면 '돈'에 대해서 철두철미 했을것이다.
 
내 주머니 속에 몇천 몇백 몇십원에 80년대 동전이 몇개 90년대 동전이 몇개인지 신경이 쓰일만큼 나는 돈에도 엄청난 결벽을 보였다.

물론 스스로가 피곤해져서 지금은 대충 제일 큰단위로 부터 두번째 숫자까지만 대략 기억해낼 뿐이다;

남 보기엔 무디고 게으르고 느리고 답답해 보이는 부분들이 어쩌면 어린시절 내 교육환경으로 비롯된
 
'미칠(아니 미친)듯한 결벽증환자'같은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일궈진 모습이다.

나름대로 성공의 결과물이랄까?



AdClix를 달아봤다.

애초에 블로그에서 '자유'라는걸 주장하며 여기저기 무료로 제공하는 서버를 찾아 무료로 배포되는 테터툴즈를 깔았다.

가끔 날려먹고, 계정 기한 문제에, 세팅 권한문제등등등......

결국 종착역은 티스토리였다.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로 운영되는 블로그인 이상 역시 '돈'에서 자유로울순 없었다.

결국 나도 기대하진 않지만 호기심 반쯤에, 블로그를 향한 내 결벽을 누그러 뜨리자는 의도로 AdClix의 광고를 달았다.






국민은행 통장 / Canon IXUS V



국민은행에서 기본이율 연 0.1% 우대이율 연 4%, 인터넷 뱅킹은 수수료 무료에 ATM기기는 국민은행에서는 항상 수수료 면제!(타행이체는 빼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e-파워통장 적금때문에 0.3%의 연이율이 우대되는 상품이 있었다.

KB Start통장으로 기존 KB종합통장을 전환하거나 신규 가입하면, 적용받을수 있다고 해서 점심도 거르고 전환했다.(통장에는 'KB Start 통장'이라고 찍히지만, 광고는 'KB Star*t'라고 광고한다)

당장 혜택을 받으려면 신규가입이 더 좋지만 지금만해도 통장계좌가 너무 많아서 이자 결산을 기다리기로 하고 전환 신청!

전환 성공! / Canon IXUS V




돈이라는 도구가 발명되고 힘든일도, 기쁜일도 일어나는 세상

지금 나처럼 금전감각을 잃어가는 것도 문제지만, 돈을 받들어 돈 아래 깔리는것도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만든 도구는 도구 본연의 쓰임대로 '쓰자'

잘 쓰고 잘 관리해야 도구는 재대로 제 역할을 한다.
나의 종교적 타이틀은 화려하다.

약 5살쯤 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있었다.

'안토니오'

그저 외할머니의 강력한 포스와 외가집 식구들의 강력한 권유(?)아래 유아세례를 받았고,

어쨋건 나는 '안토니오'라는 조금은 느끼한 어감의 세례명을 받았다.

물론 그 이후론 성당에 간 일이 거의 없음이요, 유아세례 이후의 절차(들었지만 잘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전혀 밟지 않았다.



초등학교때 친가의 할머니께서 절에 종종 나가시더니 집안에 온 가족들을 모처의 절에 불자(불교의 신도를 이렇게 부르는게 맞나 잘 모르겠다;)로 이름을 올리셨다.

나는 가본적도 없는 절에 내 이름이 올라 있지만 뭔가 관계된 활동을 한 일은 없고,

그저 조용한 절간을 거닐곤 하는일은 좋아한다.



주위 친한 친구들이 유달리 교회에 많이 다녀서 몇번 나간 일이 있다.

한번은 대학 면접을 보러갔다 고등학교 선배(물론 얼굴조차 본 적이 없었다;)의 강력한 권유로 따라 나섰다.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 사람과 학교를 다니며 얼굴을 마주치게 될 일이 조금은 걱정되어 한번 나갔고

나는 따라나선 교회에서 아무 마음 없이 성경 구절만을 되뇌이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그들에게 종교에 관한 나의 생각들을 말해 봤지만, 성경책 구절 암송 이상의 대답은 듣지 못했다.



천주교와 불교 그리고 기독교.

나는 대한민국에서 '메이저 급'으로  어느정도 인지도 있는 세 종교와 조금씩 관계를 맺었다.

유달리 기독교만은 내게 '교회에 나오는것'을 강요 했는데, 어느 하나 나를 납득시킬만한 한마디가 없었다.

물론 말로써, 논리로써 세상의 모든 일들을 판단 할수는 없는 일이고 마음으로 느껴야 하는일도 때로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과학과 경제학의 신봉자로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10년을 넘게 지내온 나에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교회가 생활이 되면...... 좋다'

라는 대답은 자연스럽게 논리를 따지는 내 사고회로에서 설득력이 없는 대답일 수 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종교를 이해하려 애쓰다 경제학자 출신인 유시민씨가 한 말을 들었는데

'종교는 사회를 위한 서비스업이다'(토씨는 좀 틀릴수 있다;)라는 말이 되려 설득력이 있다.

신의 존재 유무를 떠나서 종교가 주는 삶의 안정과 기쁨, 그리고 사회적으로 선행을 권하는 일은 충분히 합리적이지 않은가!


어린 시절 부터 교회, 성당, 절(절에 오라는 말은 별로 듣지 못했기에 제발로 찾아도 가 봤다)에 오라는 권유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믿는 연습부터 하고자 했다.

매번 자신에게 과도하게 관대하고 간사한 판단을 하는 나 자신도 믿지 못하는데

어찌 '신'이라는 존재를 믿고 내 삶을 맡기겠냐며 나에 대한 믿음이 가득하면

그때 '신'의 존재와 교감하는 종교의 세계에 한번 발을 들여 보려고 했다.

물론 반대로 완전히 자신에 대한 믿음을 얻지 못할때 그때도 종교의 힘을 빌어 '신'이라는 초월자의 존재에 잃어버린 나를 기대어 보려고도 생각했다.


요즘 남들이 보기에 내가 많이 나약하고 힘들어 보이는지 온갖 종교들이 손짓한다.

(남들 한테도 그런가;;)

증산도는 '우주의 사계절을 지나며 우주의 겨울이 오면 세상 만물을 솎아내고 새것들이 봄에 살아남는다'며

'우주의 겨울을 나자!'는 목적하에 웬갖 수련과 학술활동과 기타 활동들을 한다더라.

'살아 남는것'보다는 '어떻게 사는것'에 관심이 있는 이상 증산도는 관심 밖(사실 그네들이 종교단체인지 학술모임인지 어떤 사람들인지도 재대로 못 밝히는 집단이었다; - 적어도 내가 만난 사람은)

대순진리교는 과거에도 많이 문제시 되었지만, 동양 철학을 이끌고 와서 민간 신앙에 결속시켜 버린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고 뭔 기운을 다스린댄다. 과학공부한 공대생 의심스럽지 않을수 없다.

이 밖에도 많은 극단적인 단체들이 나약해 보이는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만

나는 아직 나를 믿어가는 과정속에 있고, 아직은 내 인생의 방향대로(잠깐은 길을 잃을지라도) 걸을 힘이 있다.

그저 지친 마음에 위로가 될수있는 편안한 공간에서 편안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종교가 아니더라도 좋지 않을까?

오랜 친구, 술집에서 만난 낯선 이, 지하철에서 졸다가 만난 옆자리 아저씨, 엘리베이터에서 진심으로 안부를 묻는 이웃.....

이  작은 만남들이 나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에는 '신'이상의 힘을 불어넣어줄 수 있지 않을까?


종교를 비하할 의도도 신을 부정할 의도도 없지만

가치관에 따라서 종교 밖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걸 인정해 주는 종교인들이 좀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만든 선견지명에 새삼 놀랄때가 많은 2000년대.

웹 서핑중 작은 격언 하나가 떠올랐다.


                          '말이 씨가 된다'

오래 전부터 쓰는 이 말은 대개 '말 조심하라'는 의미로 쓰는 경우가 많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이 격언에서 다른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말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일어날 수 있다. 평소 자주 쓰는 말에는 행동을 지배하는 정신이 담겨 있다.'




어느 라디오 방송에 한 청취지가 사연을 올리며 서두를 이렇게 장식했다.

  '나에게는 가장 친한친구 세명이 있어. (나를 포함해 3명이야)'

이 사연에서 이상한점은?

위 글쓴이의 상황은 이렇다.


                            ""  "친구1"  "친구2"

                                ┌- 친구1  (친구 사이)
                             ┼- 친구2  (친구 사이)
                                └-       (친구 사이)


정답은 나와의 친구관계를 맺은 3명중에 나 자신이 포함된다는 점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나는 나의 친구다'

철학적이고 시적인 문구일지는 몰라도 논리적으로는 이상하다.

스스로를 객채화 해서 친구라고 표현하는 대목에서 나는 '캔디'의 주제가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그럴 땐 얘기를 나누자 거울 속 나하고
                                                             -들장미 소녀 캔디(원제:캔디캔디)





장애우라는 표현이 있다.

장애가 있는 사람을 친구(友:벗 우)로 표현해서 장애인을 좀 더 가까이 하자는 의미로 만든 호칭인 듯 하다.

이 표현과 위의 '나는 나의 친구다'똑같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

2인칭이나 3인칭의 입장에서 장애우는 올바른 표현이다.

                그 사람은 장애우 입니다.
                나는 장애우 입니다.


라는 두 문장에서 장애우를 몸이 불편한 친구로 바꿔 읽어보자.

                그 사람은 몸이 불편한 친구 입니다.
                나는 몸이 불편한 친구 입니다.(?)

스스로를 친구로 지칭해야 하는 표현이 된다.

결국 장애우는 장애가 있는 본인은 정작 쓰지도 못할 표현인 것이다.

말을 만들어내고 쓰는 사람의 배려는 좋지만 정작 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를 하고 있는 말인가?



또 다른 문제점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 본인들은 장애우라는 표현을 거부한다고 한다.

이하 근거가 될만한 되는 글의 링크를 걸어본다.

  장애인과 장애우의 차이점을 아시나요? (카페:사랑+행복 나누기 이진규님의 글)



위에서 언급한 라디오 방송의 DJ 신모씨의가 하는 말에 이런 말이 있다.

'장애인이 진정 대접받는 사회라면 장애인에 관한 농담과 풍자가 자연스럽다. 동성애자를 인정하는 사회라면 그에대한 농담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장애인이나 동성애자에 대한 농담을 할수는 없는 분위기다.'

장애우라는 말을 쓰는 것으로 '나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충분이 배려하고 있어'라며 그들을 집단으로 묶어서 '내 할일 다 했다'고 하는건 어찌보면 무책임한 행동이다.

나조차 처음 장애우라는 표현을 들었을때는 꾸준히 장애우라고 써 왔으니까.

생각을 정리해 보니 장애인(人)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더 장애가 있는 사람 개개인을 배려하는 표현이고, 1인칭 시점에서 동등한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고 배려하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름을 인정하고 작은 배려와 함께 그들도 평등한 대우를 하는것.

그것이 진정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말 속에 담긴 무책임한 행동의 씨앗은 싹이 나기 전에 빨리 버리자.